우리 조상들도 낚시를 즐긴 것은 옛 산수화와 풍속화 중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특히 조선 시대 회화에서 낚시를 소재로한 그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림에 식견이 있으신 분들은 그 기법과 가치를 논하겠지만, 저는 오직 낚싯대와 채비에 초점을 맞추어, 그 화폭에서 과연 우리 조상들은 어떤 낚싯대와 찌를 사용하였는지 추측해봅니다.
묵로 이용우는 조선 전기 때의 화가(1545~1611)이며, 본관 전주(全州)입니다.
그림으로 보아 무슨 낚싯대인지는 모르겠으나, 추운 듯 뭔가 두껍게 걸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학포 이상좌는 15세기 말 조선 중종 때 화가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입니다.
어느 선비의 가노(家奴)였다고 하는데, 어려서부터 그림재주가 뛰어나 중종의 특명으로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확대해보았으나 역시 무슨 낚싯대인지는 모르겠으나, 특이한 점은 원줄이 초릿대 끝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낚싯대에 감겨 중간부분부터 내려져 있는 것입니다.
윤인걸은 조선 중기 때의 화가(1506~1637)이며, 본관은 파평입니다.
낚싯대는 배에 꽂아 두고, 무슨 생각에 잠기셨는지, 아니면 졸고 계신지 모르겠으나, 갈대와 물 위에 떠있는 부평초, 물 끓는 주전자에서 나는 김이 흩날리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낚싯줄이 날리지 않는 걸 보니 바람도 별로 불지 않나 봅니다.
특이한 것은 낚싯줄 중간에 뭔가 달려있는데, 아마 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로부터 낚시찌는 깃털을 사용하는 것과 갈대류의 고갱이를 사용하는 두 가지로 나뉘는데, 여씨춘추(呂氏春秋)의 이속(離俗)편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譬之若釣魚, 魚有大小. 餌有宜适. 羽有動静.
'... 깃털이 있어 움직임을 안다'
이숭효는 16세기 후반 화가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학포(學圃) 이상좌(李上佐)의 아들로, 세상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작품도 드뭅니다.
잡은 물고기를 왼손에 들고, 오른쪽 손에는 낚싯대를 어깨에 걸머메고 돌아오는 낚싯꾼의 모습입니다.
마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나무를 짤라서 만든 낚싯대 같습니다. 여기에서도 원줄을 낚싯대에 감아 중간부터 내려와 있습니다.
이숭효의 또다른 작품으로 어부가 낚싯대를 어깨에 걸머메고, 잡은 고기를 들고 내려오다가 옆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늙은 어부의 초연한 얼굴과 걸음걸이, 주름진 옷이 화면에 생동감을 줍니다.
여기서도 마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나무 낚싯대로 보입니다.
낙파 이경윤은 조선 중기의 왕족출신 화가(1545~1611)입니다.
버드나무 아래 삿갓을 쓴 선비가 낚싯대에 집중한 모습이 조금 어설퍼 보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대나무인지 나무가지인지 모르겠으나 낚싯대에 원줄을 감아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옹 이정은 조선 중기의 화가(1578~1607)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입니다.
술을 좋아하여 과음으로 서른 살의 아까운 나이에 생을 마쳤다고 합니다.
이 산수도는 열두 폭의 화첩인 산수화첩(山水畵帖)에 있는 두 번째 작은 그림입니다.
차가운 강에서 배를 타고 낚싯대를 드리운 그림입니다만, 무슨 낚싯대인지는 선명하지 않아 예측하기 힘듭니다.
익지 이명욱은 조선 중기의 화원 화가이며, 본관은 완산(完山)이고, 화원 한시각(韓時覺)의 사위입니다.
산수, 인물을 잘 그려 조선 숙종으로부터 화가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는 들었으나 요절하여, 유작으로 '어초문답도' 한 점만 유일하게 전해집니다.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대답하는 그림입니다.
허리춤에 도끼를 차고 있는 왼쪽 인물이 초부(나무꾼)이며, 한 손에 물고기를 다른 한 손에는 짤라 만든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있는 오른쪽 인물이 어부(낚시꾼)입니다.
낚시를 끝내고 귀가하는 낚시꾼과 나무꾼이 만나 웃으며 담소하는 모습에서 세속을 잊은 즐거움을 엿볼 수 있습니다.
홍득구는 조선 후기의 화가(1653~1724)입니다.
이들이 묻고 답하는 것은 옛 문헌에 보면 수확량이나 날씨 이야기가 아닌 세상의 이치에 대한 생각을 나누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겸재 정선은 조선 후기의 화가(1676~1759)이며, 심사정, 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리었습니다.
이명욱의 어초문답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중국 옷차림을 하고 있고 중국의 어초문답도와 비슷한 구도인데 반해, 겸재 정선의 그림에는 지게도 등장하고 조선 선비들 사이에서도 유행한 적 있던 학창의를 입고 있으며 구도도 이명욱의 어초문답도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겸재 정선의 또다른 작품인데, 여기서도 낚싯대 중간에 원줄이 내려옵니다.
모습으로 보아 선비같지는 않습니다.
낚싯줄에 매달린 것이 찌같고, 찌라면 아마 깃털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옛 문헌 한퇴지(韓退之)의 독조사수(獨釣四首) 중에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羽沈知食駛, 緡細覺牽難
'깃털이 물에 잠기니 급하게 먹은 것을 알겠는데, 낚싯줄이 가늘어서 당겨내기가 힘들 것 같다'
조선 후기의 문인 화가인 조영석(1686-1761)의 작품이며,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호는 관아재(觀我齋)입니다.
차양이 넓은 쓰개를 슨 남자가 배 위에 걸터앉아 물끄러미 수면 위를 보고 있습니다.
원줄을 낚싯대 초릿대에 매지 않고 낚시를 하는 모습이 지금과 다릅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본관은 청송.
어려서부터 그림에 천부적 자질을 지녀 스스로 물상을 그리고 현상을 만들 줄 알았으며, 20세 전후하여 정선의 문하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습니다.
아버지는 문인화가 정주(廷胄)이고, 증조부 지원(之源)이 영의정을 지낸 이름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인 익창(益昌)이 과거부정사건을 저지른 데 이어 왕세자(나중에 영조) 시해 음모에 연루되어 극형을 당하게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평생 동안 벼슬길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1748년(영조 24) 어진모사중수도감(御眞摸寫重修都監)의 감동(監董)으로 추천되었으나 대역죄인의 자손이라는 이유 때문에 파출(罷出)되었습니다.
질 항아리로 만든 화덕에 냄비를 올려놓고 불이 잘 타게 아궁이에 부채질을 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낚시하는 사람.
실제 낚시하는 모습을 그렸나봅니다.
우리 전통화의 여느 낚시 그림과 달리 이 그림은 대단히 사실적입니다.
사다리꼴 낚시 받침대는 다른 그림에서 찾기 어렵고, 또 받침대 중간에 묶어놓은 새우 채집망도 이 그림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심사정의 또다른 조어도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왠지 여유있어 보이고, 마디가 있는 것으로 보아 대나무 낚싯대인데, 두 개의 받침대를 사용한 것이 인상적입니다.
여기에서 '한강'은 서울에 있는 한강이 아니라 '추운 강'을 뜻합니다.
추운 겨울 강에서 낚시질을 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것입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여기서도 중간에 원줄이 내려온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삿갓 쓴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그들 사이에 오가는 친밀한 감정이 화면 전체에서 느껴집니다.
역시 여기서도 원줄이 낚싯대를 감고 가다가 초릿대 부분에서 내려갑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1754~1822). 본관은 개성.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특히 이 그림은 서민의 생활상을 그린 것입니다.
강가에 배를 대어 놓은 채, 배 위에 걸쳐 놓은 통대나무 낚싯대가 휘어져 있고,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둘러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정경을 그렸습니다.
조선 시대의 화가. 1797(정조21)~1859(철종10). 본관은 한양(漢陽).
여린 새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버드나무가 있는 강둑에서 낚시하는 아이들의 정겨운 모습이며, 어린 아이답게 짧은 대나무 낚싯대로 얼핏 보아도 월척인 물고기를 낚은 아이는 무표정하기만 합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낚시에만 열중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의 표정이 익살맞습니다.
조선 후기의 중인문인화가. 본관은 온양(溫陽), 호는 난석(蘭石) 또는 난생(蘭生).
'비 갠 뒤 달이 뜨고 거기서 혼자 낚시한다'는 뜻의 작품입니다. 노(櫓)도 없는 텅 빈 거룻배에 앉아 졸고 있는 듯 보입니다.
풍채로 볼 때 부유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낚싯대를 하나, 곁에는 다래끼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낚시 채비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대나무를 통으로 짤라 원줄을 감아 초릿대 부분에서 그냥 내려 낚시를 합니다.
력원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림에서 보듯이 낚싯줄은 요즘과 달리 초릿대 끝이 아니라 대나무 마디 한 칸 뒤에 묶고 다시 뒤로 줄이 늘어져 있습니다.
당시는 요즘과 같은 기술이 없었던 탓에 초릿대 끝에 낚싯줄을 묶어서 물고기를 낚을 만큼 튼튼한 채비를 못 만든 탓인가 봅니다.
연대 미상. 화면 위에 흘려 쓴 두 자는 '현진(玄眞)'입니다. 그린 이의 이름인데, 호인지 본명인지 모릅니다. 언제 살았는지, 무엇을 했는지 아직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정말 궁금한 사람입니다. 단지 조선시대에 살았다는 것 밖에는 모릅니다.
쓰러질 듯 기우뚱한 바위는 자못 험악합니다. 곧 집어삼킬 기세인데, 그 아래 노인은 아랑곳없이 외가닥 낚싯대 지그시 잡고 흐르는 물에 눈길을 돌립니다.
고요한 밤에 갯바위에 앉아 민장대 하나 달랑 들고 바닥을 더듬는 낚시는 온갖 정취를 불러일으킵니다.
찌를 달지 않고 봉돌과 바늘만을 이용해 물속을 탐색하는 낚시, 즉 맥낚시입니다. '맥을 짚는다'는 표현처럼 채비로 바닥을 짚어가면서 입질을 기다리는 낚시입니다. 과거엔 '맥낚시'가 주종이었다고 합니다.
회은(淮隱)은 조선 전기의 화가로 생몰년 미상. 산수화첩(山水畵帖) 파본(破本)에서 확인된 것으로, 어느 작가의 아호가 아닌가 여겨지는데, 조선 전기의 회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작이라고 합니다.
露砌蟲聲細 風欞月影多 難憑淸夜夢 歸釣鏡湖波
이슬내린 섬돌에 벌레소리 가냘프고/
바람 부는 난간에는 달그림자 많아라/
맑은 밤이라 꿈 이루기 어려워/
물결 이는 경호에 낚시 갔다 올까
명장 이순신 장군도 평소 낚시를 즐겼다고 합니다. 기록을 보면 전남 보성에서 신혼을 보내면서도 낚시 삼매경에 빠졌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충무공은 전쟁 중에 한 지인에게 글을 보냈는데 난이 끝나면 평범한 촌부로 돌아가 낚시를 하며 살고 싶은 소회를 적어 보냈습니다. 애석하게도 장군은 이런 소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
일본수군을 멸망시키고 나라를 중흥시켜
우리나라의 임금과 백성이 성세를 누리게 되면
저와 같은 무용지물은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옛날같이 낚시질이나 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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